역사의 쟁점 토론방

현안 역사 문제의 제시와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공간 입니다 : 의견제시는 memo 를 이용해 주세요


  김종욱(2014-06-04 18:05:57, Hit : 1630, Vote : 321
 http://www.hanhim.org
 황당한 진실 (16) 한무제 의 전쟁 서곡 --구산

황당한 진실 (16) 한무제 의 전쟁 서곡 --구산




   황당한 진실 (16) 한무제 의 전쟁 서곡


기원전 128년에 시작한 창해군 설치공작이 일년 반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는 20 여년을 참고 견디는 곤욕을 치뤘읍니다. 그동안 쉴새없이  위만조선은 세력이 강해져서 섣불리 건드릴수가 없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러면서도 우거는 한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않고  진번과 진국등의 한나라와의 접촉을 가로막고 중간무역으로 부를 늘리고 있었고, 주변의 약한 세력들을 흡수하여 확장하고 있었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흉노와의 접촉이 감지되고 있었고, 한나라의 외신이 되기를 약속한  처지임에도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한 사실이 없었읍니다.

괴씸죄가 하늘에 닿았지만  당장 무력으로는 어쩔수가 없었읍니다. 그 동안 흉노와의 전쟁이 어느정도 정리 되자 무제는 서둘러 섭하(涉河)라는자를 내세워 우거와의 설득작업을 시작 한것입니다.

이 때가 기원전 109 년 이었읍니다. 그러나 우거는 섭하가 내세운조건을 거절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는 정중히 섭하를 환송하도록 비왕 장(裨王 長)을 환송 책임자로 국경선인 패수까지 내 보냈는데 사고가 발생한것입니다.

설득작업이 실패로 끝나자 섭하는 앙심을 품고 비왕 장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한군의 요새로 달려가 무제에게 그 사실을 보고 하였읍니다.

조선의 비왕이 정확히  어느정도의 직급인지는  알려진게 없지만 총리급  아니면,  비서실장급 정도로 높은 직책인것은 틀림없읍니다.

이러한 사고를 보고받은 우거는 당장 복수를 계획하고 별르고 있었는데, 한무제는 섭하를 칭찬하고 그를 요동군 동부도위로 임명 하였읍니다.  

한서 지리지는 동부도위의 치소를 무차현 이라고 하였는데  무차현은 개주 근방으로 알려지고 있읍니다.

섭하의 쾌임을 기다리던 조선에서는 보복군을 출정시켜 섭하를 살해하여 통쾌한 복수를 하였읍니다. 역사의 전후사를 통하여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충돌에서 두번째 복수  인것입니다.

첫번째는 창해군 사건때 팽오의 살해 사건 이었읍니다.이 사건이 조선의  최후를 가져올지 누가 알았겠읍니까?

이후 한무제는 가두었던 죄수들을 병졸로 모집하여 기원전 108년 조선을 정벌하기위한 출정길에 오르게 됩니다.






구산 (2004-11-10 19:25:33)  

이 사건에 대하여 이병도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고대사연구> 87쪽 에서 동부도위부의 치소인 무차현을 봉황성으로 비정하고 있기때문에 패수로 비정하고있는 청천강에서 살해된 비왕 장의 복수를 위하여

출동군을 시켜 국경인 청천강을 건너서 평안북도 지역을 통과하고 또 압록강을 건너가 봉황성까지 침투하는데 성공 하였던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얘기가 될까요?

또한 청천강이 패수였다면, 위만의 왕험성이 낙랑군의 패수동쪽에 있다는 <한서지리지> 의 기록은 무엇일까요? 청천강의 동쪽에는 산맥들만 왕성한 맹산이 있읍니니다. 평양에서 봉황성까지 가는데 길목만 막아서 지킨다면 수개월이 걸릴수있는 거리입니다.

반대로 무차현이 개주근방 이었다면 묘도군도에서의 바다를 통한 침투는훨씬 용이할것으로 생각됩니다.  



구산 (2004-11-10 20:40:13)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

王之都王險城 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왕지도왕험성 만득병위재물 침항기방소읍 진번,임둔,개래복속 방수천리.

元封元年 漢使涉何誘諭 右渠終不肯奉紹 何 去至界上臨浿水.殺送何者 朝鮮
원봉원년 한사섭하유유 우거종불긍봉소 하 거지계상임패수.살송하자 조선

裨王長. 卽渡入塞.(正義曰入塞 平州楡林關也)
비왕장. 즉도입새. 정의왈입새 평주유림관야

<사기> 조선열전의 정의는 섭하가 패수를 건너 들어간 요새는 산해관근처에 있던 유림관 이라 하고 있읍니다. 패수가 한반도내에 있다는 학설을 믿지못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구산 (2004-11-11 10:48:30)  

이 글은 위에 제시된 <사기> 조선열전의 첫번째 기록에대한 정의의 주석입니다.

王之都王險城 滿得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왕지도왕험성 만득병위재물 침항기방소읍 진번,임둔,개래복속 방수천리

[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정의 괄지지운 조선고려맥동옥저오국지지 국동서천삼백리 남북이천리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재경사동 동지대해사백리 북지영주계구백이십리 남지신라국육백리

北至靺鞨國千四百里]
북지말갈국천사백리

이상 소개드린 <사기> 조선열전의 위만조선에대한 기록은 거의 유일한 기록입니다. 거기에 위만조선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것입니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조선 고려 맥 동옥저등 오국의 땅은 동서로 천삼백리, 남북으로 이천리인데, 경사(낙양)동쪽으로 동에 이르러 큰 바다와 만나고, 바다안에서 사백리리다.

북으로 영주경계에 이르고,거리는 구백이십리다. 남으로 육백리를 가면 신라국에 이르고,북으로 천사백리거리에 말갈국이 있다.]

낙양에서 동쪽으로 큰바다에 이른다면 조금은 막연한 표현이지만 한서나 삼국사기 권 34 잡지3 에는 동북 5000리라는 기록과 등주라는 지명을 볼수 있읍니다.

등주가 오천리라는 기록은 <동국고승전> 에서도 볼수 있읍니다.
이 곳을 산해경 에서는 조선의 위치를 "동해지내"라 하였고, 한서 지리지 권24 와 자치통감 에서는 "연제지간"이라 하였읍니다.

이 곳이 갈석을 지나 동으로 낙랑과 현도군을 두었다고 하는 위치로 봅니다. 등주에서 도리진(여순~대련)까지의 거리는 500 리라는 기록을 가탐의 도리기에서 확인 할수 있읍니다.

< 제왕운기>의 "요동별유일건권 두흥중조구이분 홍도만경위삼면 어북유륙연여선 중방천리시조선강산 하략....원문생략
제왕운기의 이 대목을 차근차근 훑어보면 이곳이 한반도가 아니고 묘도군도라는 해석을 하게 될것입니다.

동서의 폭이 천삼백리라면 한반도가 어느정도 걸리는지는 미지수지만 주 강역은 바다안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남북이 이천리라는 설명은 요동반도의 서쪽을 위주로한 천산산맥의 남쪽을 뜻한다고 봅나다.

서쪽으로 영주 경계가 900여리라는 설명은 바다로 윤몰된 요동만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이곳을 영주 또는 청주로 불렀다는 자료는 생략합니다.

이곳이 요동군 험독지역으로 추정되고, < 산해경> 에 "북해지우"라고 기록된 지역으로 봅니다.

그런데 남으로 600리거리에 신라가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괄지지가 작성된 시기는 당나라때 입니다. 당시 신라의 영토는 산동반도의 동해안지방을 관할하고 있을 때입니다.

서기 732년 신라의 성덕대왕은 당 현종으로 부터 영해군사(寧海軍使)라는 직권을 받아 당시 영해 (연태) 를 중심으로한

영성, 석도등 신라방이 형성 되었던 지방을 관할하고 있을때를 말한다고 봅니다. 상세한 사항은 졸저 <신시본토기> 의41~51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산 (2004-11-12 21:33:23)  

요지음 한창 위세를 떨치고있는 송호정 박사는 <고조선 국가형성과정 연구> 로 서울대학교 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가 촉망되는 젊은 교수입니다.

그는 04,10,05 일자로 <단군 만들어진 신화> 라는 놀라운 책을 펴낸바 있읍니다. 그 책안에 요즘 제가 올리고 있는 위만조선에 대하여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를 살펴봤더니.

위만은 누구인가

전략...도대체 위만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의 국적이 문제되는가. 다음은 위만에 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있는 <사기> 조선열전 의 일부 내용이다.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사람이다.....(한나라가 일어난 뒤에)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부관으로 있던 위만도 망명했다.

무리 일천여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했다...... 차츰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제(齊)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됐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 그때가 마침 혜제(惠帝.기원전 194~180)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국경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오랑캐의 군장(君長) 들이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주변자역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가 됐다.
*<사기> 권 115 (조서열전) 제 55 이상...

송교수는 이상으로 위만과 위만조선에 대한 <사기> 조선열전의 소개를 마친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 있읍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위만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있는 정의의 주석을 왜 빠틀였는지를 알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正義 括地志云 朝鮮高麗貊東沃沮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정의 괄지지운 조선고려맥동옥저오국지지 국동서천삼백리 남북이천리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재경사동 동지대해사백리 북지영주계구백이십리 남지신라국육백리

北至靺鞨國千四百里]
북지말갈국천사백리

송교수는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을 같은책 167쪽의 상반부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못볼수가 없읍니다. 이러한 해석뒤에 따르는 잡다한 주장들은 그렇기 때문에 믿겨지지가 않는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고조선사 학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국조를 부정하는 학설을 이렇게 다루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는 <한국 고대사속의 고조선사> 를 통해서도 산해경의 조선위치를 설명하는 "동해지내, 북해지우(東海之內 北海之隅) 의 해(海)를 바다로 해석한 사실이 없읍니다.

그러니 바다가 등장하는 주석을 피할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다가 등장하는 사료는 이것 말고도 신 구당서등 많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들이 등장하면 모두 못본체 외면하였던가 아니면 잘못적은것 이라고 부정하였읍니다. 이러한 과오들이 공공연히일어나고 있는데도

이 나라 사학계의 지도자들은 침묵을 지켜왔읍니다. 허심탄회하게 찝찝한 마음을 털어내고 학자본성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처럼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 될때라고 믿기에......  



구산 (2004-11-14 10:55:19)  

송교수는 <단군 만들어진 신화> 라는 책의 171쪽을 통하여 위만 조선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읍니다.

현재 중국의 연.진시대 장성 위치를 보건대, 위만의 초기 거주지역은 대체로 천산산맥 동쪽에서 청천강 일대에 이르는 너른 지역을 포괄했던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지역에 기원전 2세기 말경에 위만이 들어와 살면서 이른바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은 압록강 유역 일대에서 청천강 유역에 살고 있던 유이민과 토착민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연.제에서 온 망명자를 복속시키고, 남방으로 진출하여 왕검성(지금의 평양)을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하략

그렇다면, 위 <사기>의 조선열전에서 말하고 있는 동쪽 바다로부터 위만조선의 위치가 동쪽으로 대해 400리, 북쪽으로 영주 920리 경계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안에 들어올수 없고,

북쪽1400리(천산산맥이 끝나는 북옥저)의 지점에는 즉 말갈의 위치가 되며, 천산산맥의 동쪽으로는 동옥저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천산산맥의 동쪽에도 근거지가 될수 없읍니다.

동옥저는 정의의 주에서 말하는 등주로부터 동으로 1300 리를 벗어날수 없다고 해석 되기때문에 송교수가 말하는 초기 위만조선의 자리에는 맥,동옥저 등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논란이 심했던 동옥저나, 단단대령의 위치가 한반도내로 비정될수가 없고, 더구나 동옥저나,

동예등이 한반도의 함경도나 강원도 지방으로 비정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되겠읍니다. 위만조선의 왕도나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의 평양이 될수 없다는 주요한 근거를 <사기>조선열전의 정의의 주가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송교수는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유기한체 사서의 기록이

빈곤함을 탓하였읍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근거를 내세워 위만조선의 위치
를 왜곡한 것입니다. 만리장성이 지금의 요양까지 쌓여졌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최초로 등장하는 양평의 위치를 현 요양으로 착각한 결론이겠지요.  



구산 (2004-11-17 11:01:22)  

송교교수의 연,진,한장성에대한 주장은 이렇습니다.

연. 진. 한대의 장성이 말해주는것들

어환이 쓴 <위략>에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친 후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객좌현, 능원시, 건평현), 요서군(조양시), 요동군(요양시) 등 5군이 설치되고 장성(燕 長城)이 축조됐다고 한다.

여기서 장성은 물론 연나라시기에 동호를 물리치고 쌓은 장성으로 동호및 흉노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라 할수 있다.

종래 고조선 요령성설을 주장하던 학자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북경 근처에 이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연나라 때 동호와 고조선을 치고 경계에 쌓은 장성이 북경 근처의 산해관이라 주장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개축한 것이다. 동호족과 고조선 세력을 밀어 내고 연과 진. 한대에 설치한 장성과 초소는 바로 요서 지역과 요동 천산산맥 일대에 까지 이른다.

한(漢)대에는 우북평군, 요서군을 유지하면서 연 장성 이남에 봉화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성을 통해 한(漢) 은 흉노. 선비. 오환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식으로 통치 했던것이다.....중략

그렇다면 기원전 4~3세기 및 기원전 2~1 세기에 해당하는 장성이 요서및 요동 지역에 설치 됐다고 볼때, 이 당시 위만조선의 영역은 당연히 장성 동쪽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북경 오른쪽에 흐르는 난하 근처의 산해관을 염두에 두고 고조선의 영역을 찾는 일은 없어야 할것이다.  



구산 (2004-11-17 11:46:33)  

과연 송교수의 주장대로 연.진 장성이 요동군의 요양까지 진출 하였을까요? 근거로 제시한 <위략>을 보겠읍니다.

[一]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

이 위략은 <사기> 흉노열전의 "연 역축 장성 자 조양(造陽) 지 양평(襄平)에서 근거를 따 온것입니다. 양평은 지금 요하의 서쪽에 설치되었던 요동군의 양평현 이었으므로 같은 장소였다고 봅니다.

이 지명문제 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귀가 따갑도록 설명 하였지만 다시 소개 올립니다.

* <사기> 진시황본기 2세 황제 원년조
* [염철론] 험국(險國)
전국시대 연국의 동부 국경이 요수와 갈석이었다고 기록됨.
* <한서> 장진왕주전(張陳王周傳)
* 윤내현 의 서변경계고
중국정사 조선전 역주 (1) 77~79쪽  



구산 (2004-11-17 11:57:20)  

秦漢時遼東郡地唐沒於渤海
<독사방여기요> 의 기록입니다. 당시 요동군이 양평의 발해 윤몰후에 전체가 윤몰 된것으로 보입니다.  



구산 (2004-11-20 10:02:36)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사 4권의 잘못된 기록입니다.

한국사 4권 83쪽의 첫머리에.......
그후 연에는 훌륭한 장수 진개가 있어 인질로 갔었는데 동호가 그를 상당히 신임 하였다.진개가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그들을 패주시켜 천여리 땅을 빼앗았다......연은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朝陽)으로 부터양평

襄平)에 이르렀다. 그리고 상곡, 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여 동호에 대항하였다. <사기> 권 110.열전 50. 흉노 >

이 문항의 조양(朝陽)부분은 조양( 造陽)으로 바꿔야 되는것 아닌가? 朝陽과 造陽은 거리와 방향이 차이가 클뿐 아니라 한나라 시대 에는 朝陽이라는 지명은 아에 없었고 그 자리에는 유성 (柳城)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중국정부가 발행한 역사지도에서 확인이 됩니다.

송호정교수가 연북장성이란 성채의 방향을 주장하는 위치도 대략 이 위치를 비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근거가 모호합니다.  






Name
Memo      


Password



공지   한단고기의 평가--마고사이트(추천 151번에서 펌) [2]  김종욱  2014/05/28 1728 279
공지   동북 공정은 사기다 --주은래 (1987명 조회 스팸리플로 다시 게재)  김종욱  2009/05/24 3727 632
공지   소위 지나가 자기네 역사라 하는 금(金)나라, 청(淸)나라 역사도 우리 역사다.(=역 동북공정)  김종욱  2008/04/25 4694 1049
공지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김종욱  2007/02/28 4678 717
220   충효예 정신에 대한 옳바른 시각(국방일보 : 군에서 배우는 충효예 11-22회 분량)  김종욱 2014/06/30 1941 291
219   中華史觀’ 고구려 넘본다… 省마다 한국측 조직적 번역-대응 [우리의 바른 역사를 찾아서에서]  김종욱 2014/06/30 1425 314
218   한자는 은(殷)시대 한민족이 만들어 쓴 글  김종욱 2014/06/09 1834 344
  황당한 진실 (16) 한무제 의 전쟁 서곡 --구산  김종욱 2014/06/04 1630 321
216   [류근일칼럼] '분노'를 씻어내는 길  김종욱 2014/05/28 1378 357
215   마고문화로 다시찾는 동아시아 고대사와 한국역사 1 ---마고김황 혜숙  김종욱 2014/05/28 1632 321
214   7000만 동포가 뭉치는 길!! [12]  김종욱 2006/05/09 4576 793
213   포식자’ 중국을 기억하라-- 허동현 교수 [4]  김종욱 2006/04/02 5675 1006
212   한일 두 정상의 회담에 대한 소회 [1]  김종욱 2005/06/16 5328 1126
211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의 실체  김종욱 2005/05/10 4678 778
210   어느 좌파 지식인의 '커밍아웃'  김종욱 2008/09/07 3370 644
209   역사적 순간-- 노·부시의 판가름 대면 [2]  김종욱 2005/06/07 4079 749
208   “일 역사왜곡의 정치적 의도에 말려들지 말라”  김종욱 2005/05/02 3498 633
207   황당한 진실 (31-1) 후세 사가들의 기자논쟁 2  구산 2005/04/16 4060 685
206   황당한 진실 (31) 후세 사가들의 기자논쟁 1  구산 2005/04/16 3877 1245
205   황당한 진실 (30 ) 조선의 정변과 기자족의 망명 1  구산 2005/04/09 4942 961

1 [2][3][4][5][6][7][8][9][10]..[12] [다음 10개]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