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쟁점 토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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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욱(2008-04-25 22:39:07, Hit : 4732, Vote :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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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지나가 자기네 역사라 하는 금(金)나라, 청(淸)나라 역사도 우리 역사다.(=역 동북공정)

소위 지나가 자기네 역사라 하는 금(金)나라, 청(淸)나라 역사도 우리 역사다.(=역 동북공정)  

번호: 43 글쓴이:  천제환인(기천 천하 사이트 한힘사이트 추천 144)
  날짜: 2004/09/06 23:54

     지나(=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보며, 사학을 전공하는 저로써는 심히 걱정이 됩니다.
아니 고구려사 왜곡은 사학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국민의 자존심에 집결되는 큰 문제입니다. 한민족 역사상 중원 정벌을 꿈꾼 강한 제국 고구려

고구려는 그 자체만 해도 우리민족 정신의 지주요, 자부심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며, 고구려사를 자기가 가질려고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이들은 고구려사를 집어 삼키기 위해 23억원을 들여, 소위 동북공정이란 프로젝트를 가동시켰지요

학계에서 이 움직임을 발견하고 정부에 대응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실효도 없는 수도 이전 문제, 파병 문제로 탁상 공론을 일삼았고, 결국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변해버렸습니다.

이제와서 대응한다고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고심하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간 격이지요, 정부를 보면 이런 속담이 생각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전 동북공정에 맞서 또 하나의 카드로 대륙공정(=역 동북공정)을 들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륙공정은 단순히 고구려가 우리 역사다 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륙공정이란, 고구려와 고구려 이전의 국가 단군조선(檀君朝鮮), 배달나라(밝달나라)의 역사, 그리고 고구려 후신인 대진국(발해)과 대진국의 후신인 금나라, 신라 왕조의 계승국 청나라를 우리 역사로 포함하는 것입니다.



금나라와 청나라가 우리 역사다?

많은 분들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사실, 그런만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사 시간에, 동양사 전공할 때 금나라, 청나라가 중국의 역사라고 배워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국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중원을 지배한 민족들 대부분은 한족이 아닌 비한족 계열이 많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당(唐)나라 또한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선비족의 나라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동북공정이란 카드를 내건것도 자기들이 중원을 지배한 경험이 다른 민족에 비해 적으니까 그런 열등감을 벗어나고자 제시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중국내 소수민족 티베트, 위구르의 독립을 막으려는 사전 조치라 저는 생각합니다.(이덕일 교수는 동북공정이 미국 견제용이라고 합니다.)

금나라와 청나라가 왜 우리의 역사인지 조목조목 그것을 따지고자 합니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죠

금나라를 세운 시조는 함보로 고려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사』 <세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의 시조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시조가 완옌부에 살기 오래였는데 그 부족 사람이 일찍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화해할 수 없었다. (이에) 완옌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의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준다면 완옌부에는 나이 60에 시집을 안간 어진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완옌부의 ㅏ람이 되게 할것이오'하니 시조는 그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상대부족) 나아가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인해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데 그치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할 것이다. 너희들은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니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중략)

뒤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 우루요 다음이 워루 였다. 또 주세판이라는 딸도 낳아 드디어 완옌부의 사람이 되었다."



『삼조북맹회편』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 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자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 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컨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새겨 사람들을 가르쳐 빛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       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하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을 삼았다.



고려사 세가 예종 10년 정월 초의 기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예전에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이 달아나 여진족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를 금의 조상이라 한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에 여진족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구얼 태사를 낳고 구얼이 훠러 태사를 낳았다. 훠러는 아들이 많았는데 큰 아들은 해리버요, 막내 아들은 잉거였다. 잉거가 가장 웅걸하여 민심을 얻었더니 잉거가 죽으니 해리버의 장자 우야소가 위를 이었으며 우야소가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금의 태조인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다소 건방진 국서이지만, 국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 태조 아골타는 자신의 가문의 기원이 고려에 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



또한 금나라가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공격할 때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과 함께 금에 맞서자 아골타는 발해 유민을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발해 유민들을 회유할 때 아골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女眞 渤海 同本一家"



송나라 역사책인 『송막기문』에는 "여진 추장은 신라인으로 성은 완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금 태조가 자신들의 국명을 금이라 정한 이유를 『만주원류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여진 즉 금(金)의 시조는 고려인(또는 신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금의 건국 과정에서 많은 발해인이 활약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호, 대호,고표, 곽약사 등으로 이들 발해 유민은 금의 건국 과정의 일등공신이었고, 금이 내치를 다스리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여진 정권 그러니까 금의 황제는 발해계였다고 합니다.

믿어지십니까? 안 믿기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금의 3대 황제인 희종이 폭정으로 전횡하자, 해릉왕이 희종을 살해하고 금의 4대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해릉왕은 금 태조의 서장자(庶長子)였던 요왕 종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대씨 성을 가진 발해 여인이라고 합니다. 희종을 죽이고, 황제위에 오른 해릉왕은 발해 출신을 대대적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태조 아골타의 아들인 예종과 이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세종에 의해 시해당합니다.

세종 또한 자신의 외가가 발해계라 해릉왕과 마찬가지로 많은 발해 사람을 기용합니다. 이들 발해인들은 금 황제의 보호 아래, 조정에 두각을 나타냈고, 금이 멸망할 때 까지 금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와 같이 금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중국 한족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 역사는 우리민족 방계의 역사입니다. 일찍이 손진태 선생은 금사를 우리 역사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청나라 황제의 성 애신각라:신라를 사랑하고 잊지말자

다음은 김산호 선생님의 105대 천황 존영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후김(대청제국) 시조 애신각라 누루하치
[愛新覺羅-大淸帝國]




북부 한국, 만주대륙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영원한 보금자리였으며, 한웅천황 이래로 단군쥬신, 가우리, 대가우리, 대김제국을 거치며 민족 사이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민족의 본 고향땅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며 발생된 행정 공백의 틈을 뚫고 한족(漢族)의 신흥 세력인 명나라와 옛 땅을 다물하려는 왕씨 가우리[高麗]의 다툼에서 민족 숙원의 절대명령을 거부하고 제 한 몸의 영예에만 집착했던 이성계의 반역으로 그만 민족의 귀중한 성역을 명나라에 빼앗겨 버리고만 통한이 서린 우리 땅이다.


비록 명나라가 만주를 빼앗았다고 하나 그들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겨우 요녕성 정도에 불과했고, 그 동쪽의 광활한 대지에는 여전히 옛 여진족(女族)이 각 부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본서가 일찍이 밝힌 것처럼 여진족은 쥬신[朝鮮]족으로 우리와 같은 족의 일파이다.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여진(女)은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쥬신[朱先, 朱里, 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민족[朝鮮=珠申] 쥬신족임은 명백한 진실이다.



개천(開天) 5457년: 서기 1559년, 만주의 대영웅 누루하치[努哈赤]가 멍거테무얼[猛哥帖木]의 5세손, 탑극세(塔克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애신(愛新)은 실라[新羅]를 사랑하고, 각라(覺羅)는 실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옛 조국 실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옛 실라의 망명 집안인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 신단민사는 애신각라는 김태조(金太祖)와 같이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성 그리고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했던 것이다.





개천(開天) 5481년: 서기 1583년, 누루하치는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을 위하여 만주에 들어와 있는 한족(漢族: 明國)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군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한족을 몰아내려면 우선 만주를 통일한 후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이리하여 시작된 민족 통일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건주 여진(여진이 여러 부족중 가장 강력했던 부족)을 손에 넣은 후 서기 1587년에는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을 구축하여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서기 1607년에는 후이파를, 13년에는 우라[烏拉]를 병합하여 명실공히 통일 여진국을 만든 후 서기 1616년에 한(汗)의 지위에 올랐다. 새 나라의 이름은 대김제국(大金帝國)의 영광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후김(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였다.


누루하치는 역사의 초기부터 써 오던 한자(漢字)가 우리 쥬신족의 소리말에 적당치 않으므로 새로운 글자 "여진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여 나라의 기본으로 하고 도성을 허투아라[赫圖阿拉]로 옮겼다.



서기 1618년, 마침내 대명 선전포고를 하고 푸순[撫順]을 곧 취하더니, 곧이어 청하(淸河)지방의 한족들을 멀리 서쪽으로 내쫓고 이 지역을 완전히 다물해 내었다.
개천(開天) 5523년: 서기 1625년, 후김은 서울을 심양으로 옮기고 요하 이동 70여성을 모조리 탈환하였다. 누루하치가 죽자 그의 여덟번째 왕자인 황태극[皇太極]이 즉위하여(1,636년), 나라 이름을 후김(後金)에서 청(淸)으로 고치고 여진인을 만주인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후김, 청으로 이어지는 만주의 동포들은 남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조선[李氏 朝鮮]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민족의 원수인 한족[漢族之國=明]을 토벌하자고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얼빠진 이씨조선 왕족들은 동족인 청을 거부하고 명나라에 빌붙어 만주 동포들을 실망시켰다.


오히려 이를 강압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군사 행동(丙子胡亂)을 굴욕적인 국치였다고 원한의 감정만 쌓게 되니, 이씨 왕족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가히 실라가 당을 상대로 행했던 추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며 생업을 꾸리던 만주인들은 기마민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특유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그 유명한 8기제도(八旗制度)가 그것이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밭 갈고 사냥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일단 전시 동원령이 내리면 그들이 속한 깃발을 들고 자신들이 타던 말에 올라 그대로 전선으로 내닫는 체제여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기동력이 대단히 신속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8기에는 제각기 고유한 색깔이 있었다. 정황(正黃), 정홍(正紅), 정람(正藍), 정백(正白), 양황(黃), 양홍(紅), 양람(藍), 양백(白)이었다. 8기제도는 군사, 경제가 일체된 사회 체제로서, 누루하치는 8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정 대사는 8기 수령들이 공동으로 상의하여 결정하고 최고 통치자의 계승권도 8기에서 선거를 통해 뽑았다. 이처럼 청조(淸朝)는 항상 준전시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국민이 모두 동원되는 국가 총동원 체제였으므로, 인구 비례상 10대 1이 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무려 276년 동안 중국인들을 다스리며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조가 중국을 제압하고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세습왕제를 받들고 있었으면서도 장자가 아니라 왕자들 중 가장 훌륭한 왕자를 뽑아 황제로 추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씨조선은 왕을 조종하려는 실세들의 첨예한 대립과 투쟁으로 나라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청의 이 제도는 정여립이 생각했던 왕의 선출 방식이었는데 그는 못난 이연 왕을 만나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 우리 만주족이 중국 한족을 다스리면서 주인행세를 했음은 서양인들 눈에도 정확히 비췄던 듯싶다. 그것은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다스리는 관리를 "만다린"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다린-MANDARIN"의 한자는 "滿大人(만대인)"으로, 곧 만주 대인이라는 뜻인데, 중국 발음으로 大가 "다", 人이 "렌"이기 때문에 만주 대인이라는 말이 만다린으로 변하였음을 똑똑히 밝혀 둔다.



※ 만주인들의 중국인 차별 정책도 대단했었는데, 한 예로 중국인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고 길게 따내려야 했으며, 만주 땅은 내지(內地)라 하여 중국인들은 출입을 제한당했고, 특히 성지(聖地) 백두산 100리 이내로 접근하면 죽음으로 죄를 갚아야 했을 정도였다.



※ 백산흑수록(白山黑水錄)에는, 청조(淸朝) 시조는 장백산 북쪽 돈화현(敦化縣) 액마색(額摩索) 남쪽 100리 지점인 야액다력성(野額多力城)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 본 저자가 만주의 곳곳을 헤매며 애신각라의 발자취를 추적하던 중 몇몇의 괘씸한 중국의 학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선족의 학자라는 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애신각라를 만주나 한국인이 아닌 중국 송(宋)나라 인으로 조작하여 탄생시키려는 공작을 한참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우선

"애신각라의 이름을 후금이나 만주의 8대 성씨들 중에서 발견할 수 없으므로 원래 만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분명히 중국의 송나라가 망한 후 김제국(金帝國)시절 만주지방으로 망명했던 교로(交魯)가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교로(交魯)의 북중국 발음이"Jiao-lu"여서 애신각라의 각라(覺羅)의 중국식 발음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애신각라의 애신은 이름이고 각라는 성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중국에서 성을 이름 다음에 썼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고, 어째서 중국학자가 한자의 뜻을 버리고 발음을 따르는가 하는 질문도 묵살한 채, 하여튼 애신각라는 만주인이 아니고 송나라 사람임으로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의 논문은 수정 없이 그대로 발표하여 당당하게 역사를 뒤집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무섭게 꼬이고 뒤틀리며 왜곡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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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상 (2005-01-16 10:26:50)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동북공정에 대해 두가지만 말씀드리죠. 그의 시작은 78년 등소평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합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馬大正이라는 인물이 모택동주의가 실효되고나서 그 대안으로 중화민족주의를 제창하느라 끌어들인 것이 동북지방의 고대사였지요. 그리고 95년부터 探原工程 그 뒤를 이은 三代工程에 이어 2003년부터 후진타오의 지시로 200억위안(한국 돈 3조원) 규모의 국가예산을 투입하여 고구려사 편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김종욱 (2005-01-16 10:36:59)  

<<95년부터 探原工程 그 뒤를 이은 三代工程에 이어..>>

노희상 교수님 방문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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